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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

느 인류학자가 아프리카 부족에 대해 연구하던 중 마을 아이들을 모아 놓고 게임 하나를 제안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보기 드문 싱그러운 과일 바구니를 나무 옆에 놓고 ‘누구든 바구니까지 먼저 뛰어간 아이에게 과일을 모두 다 주겠다’고 했다. 아이들이 과일바구니를 향해 달릴 줄 알았던 학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놀랍게도 아이들은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과일 바구니에 다다르자 그들은 모두 함께 둘러앉아서 입안 가득히 과일을 베어 물며 나누어 먹었다. 게임을 제안했던 학자는 아이들에게 ‘누구든지 1등으로 간 사람에게 모든 과일을 다 주려고 했는데 왜 손을 잡고 같이 달렸느냐?’라 묻자 아이들은 일제히 ‘UBUNTU!!라 대답하였다. ‘우분투’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이다.

앵커 2

언론은 정보 전달을 하는 매개체로써 시민에게 있어 ‘상’이나 ‘이념’을 형성한다. 아무리 중요한 문제라도 언론에서 주목시키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반대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건도 언론에서 지속적으로 보도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이것이 바로 언론의 힘이다.

앵커 3

개인과 소수가 더욱 주목받으며 개인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분명 ‘나’라는 개인은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내가 살아가는 이곳은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이고, ‘너’의 문제가 돌고 돌아 ‘나’의 문제가 된다. ‘너’와 ‘나’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사회에서 살아간다.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에서 사랑, 동정, 배경은 필요 없다. 그저 인간이기에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인간을 존중하며 함께 사는 사회는 후원을 하는 근본적인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빈곤포르노는 후원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며 변질된 후원은 우리 사회의 암묵지가 되었다.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 속에서 간과된 문제점을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조용한 강가에 작은 돌멩이 던지는 파급력을 가져온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헬렌 토마스는 "질문하지 않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라고 했다. 장삼이사의 각성도 중요하지만 그 최전선에 있는 언론인의 핵심은 질문이다. 

우리는 이번 보도제를 통해 질문을 던져본다. 아직도 많은 모금액을 모으기 위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자극적인 사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모금액은 진정 난민들이 원하는 도움을 주는가?

우리는 과연 그들을 돕고 있는 것일까 돕고 있다 생각하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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